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한다. 외식을 할지 말지 같은 사소한 선택부터, 호감이 있는 그와 식사를 마친 후 애프터 신청을 건넬지 말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직, 창업, 편입과 유학 등 학업과 취업 같은 장기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버릴 수있는 선택의 기로까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연극인의 주머니 사정에 자녀 양육까지 더해졌으니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고민하지 않고 한가지 선택을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10년, 20년 그렇게 그녀의 우직함은 연기력으로 결실을 맺었고, 연기에 몰입한 시간만큼 사람들은 그녀의 몸짓에 빠져들어 갔다. 대중적 인지도를 얻을수록 주변은 그녀를 더욱 선택의 기로로 내몰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의지에 연기는 더욱 농밀해져 갔다.

연극계에 발을 들인지 35년, 연극인으로 시작해 스크린과 안방가를 들락거리며 완연한 베테랑 배우로 거듭난 그녀가 이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준비 중이라 한다. 놀랍게도 연극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재단의 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사무를 재편 중에 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더 나은 연극 동네, 연극에 집중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그녀를 만나 보자.

안녕하세요. 길해연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극단 작은 신화에서 연기를 시작해 현재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배우 길해연 입니다. 최근엔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연극인들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괴물〉, 〈로스쿨〉, 〈보이스 4〉 그리고 영화 《미드나이트》까지. 상반기 안방가에서 길해연 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의 이사장직까지 수행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실 거 같아요.
출시작이 몰릴 때는 기자님과 비슷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런데 사실 출시일과 촬영일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거든요. 영화의 경우는 더 그래요. 처음엔 이래저래 설명을 드렸는데, 이제는 굳이 아니라고 얘기하지 않고 있어요. 참 바쁘지 않냐고 물어보셨죠? 그러게요~ 호호.

그러고 보니 최근 참여작은 스릴러가 많네요.
장르물이라 그러죠? 요새 미니 시리즈를 가만 보면 일상적인 이야기보다 콘셉트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심리 스릴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제 취향에 맞는 역할들이 아직도 저를 찾아온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죠.

길해연 님이 최초로 몸담은 극단으로 알고 있는데 작은 신화는 어떤 곳이었나요?
1986년 창단한 작은 신화는 10개의 대학극회에서 우리들만의 새로운 연극을 하기 위해 결성한 극단이에요. 창단 단원으로 참여한 제 인생의 첫 극단이기도 하고요. 공동창작이라는 당시 연극 동네에서 생소한 시스템을 도입한 극단이었죠. 배역을 나누고 역할을 맡아 정해진 틀 안에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역할 구분 없이 다 함께 땀 흘려 연극을 만드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짜여진 무언가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는 것에 꽂힌 거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어요. 이끌어 줄 선배도 없이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의 청춘이 모여있으니 어땠겠어요? 창작극인지 장작극인지 모를 그런 나날을 보내다 초대 대표였던 이유철 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게 돼요.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죠. 넋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추모 공연뿐이었어요.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공연을 마친 뒤,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다 같은 걸 느꼈어요. 이게 우리의 소명이라는 것을요.

바로 그 “10년만 해보자.”가 여기서 나온 것이었군요.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에요. 당장에 극장 대관비가 없어 카페를 순회하며 공연하거나, 냄비조차 없어 커피포트 하나를 돌아가며 썼지만, 10년이 지나 있으면 달라도 무언가 다를 거란 낙관을 가지고 10년을 이야기 한 거죠. 그런데 10년 뒤에도 똑같은 거 있죠? 주머니 사정은 그대로에 여전히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만 껌뻑일 뿐 아무도 말을 안 해서 “에이, 10년만 더 하자.”고 했더랬죠.

길고 긴 인내를 거쳐 완성된 길해연의 연기 철학을 말씀해 주신다면?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시작을 해요.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분석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배역을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요. 등장인물의 대사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사소한 행동거지마저 곱씹으며, 드러나 있지 않는 태생과 자라온 환경을 생각해봐요. (곰곰) 그러면 어떤 역할은 쉽게 이해가 되기도, 어떤 역할은 왜 나한테 맡긴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기도 해요.

얼마 전 연기한 〈괴물〉의 도해원처럼, 자식에게 집착하고 참견하는 어머니는 제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상인데요. 긴 시간 연기를 해오며 느낀 것이 있다면 어떤 배역이든 결국 내 안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만 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다짐한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충돌해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 인간의 본성에는 다 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배역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 안의 것들을 끄집어내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배우는 재창조자 입니다.

새로운 캐릭터에 매몰되어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자칫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는 않아요. 머리로 이해하고 연기하는 것이 모방이라면 가슴으로 이해해야 진정한 교집합을 만들 수 있어요. 다시 말해 내가 배역에 다가가서 나의 관점을 통해 캐릭터가 새 생명을 얻는 것이죠. 빈 껍데기가 무언가 바라보고 흉내 낸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요? 나라는 존재가 없이는 연기할 수 없어요. 비단 연극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 해당하는 부분일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런 말씀을 하셨죠. 당장 눈앞의 공연을 완성시키는 것보다 꾸준히 공연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어떤 맥락에서 하신 말씀인가요?
과거엔 연기라는 게 어느 지점을 목표로 잡고 그곳을 향한 레이스를 펼치는 거라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경험이 늘고 때론 주저앉기도 하며 생각이 바뀌었어요. 연기와 인생은 같이 흘러가는 존재라고요.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제 인생과 함께 흘러가며, 무대에 설 수 있는 날까지 할 수 있다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거 같아요.

오늘도 많은 연극인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땀 흘리고 있습니다. 무대 위 세계는 훨씬 깊고 넓어졌는데, 무대 뒤편 일상에선 여전히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며,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순 없겠지만, 영화와 드라마 제작 환경은 많이 개선되었는데 말이에요. 물론 몇 날 며칠 밤을 꼴딱 새우는 스태프의 노동 환경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이뤄져야 할 변화지만 연극 쪽은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죠.

유독 연극 쪽만 제도적 보호가 느린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자본의 유입이 늦고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가장 규모가 작은 집단이라는 점은 참신한 시도, 실험적 도전을 하기 용이한 점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제도적 완비가 취약하기도 하네요.

연극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개선이 시급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어려움은 인식이라고 생각해요. 연극배우는 가난하다, 연극을 하면 어렵다는 이미지밖에 안 떠오르잖아요. 직업의 특성이라고는 하나 수개월의 연습 기간을 근로로 여기지 않는 예술계의 시각과 잘못된 관행이 고쳐지지 않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든 투잡을 뛰어서 연습 동안의 생계는 오롯이 본인이 부담 해야 하는 현실이죠. 연극인을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인으로서 권익과 지위를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제도적 개선과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만들어진 것이군요!
말도 마세요. (손사래) 제가 그것 때문에 박정자 선생님께 얼마나 불려 다녔는지 몰라요. 변호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때론 혼나기도 하며, 연극인 실태 조사와 세미나 준비, 의안 발제 등 재단 설립을 위한 업무 이곳저곳에 참여해야만 했어요. 나중엔 “얘, 해연아~” 소리를 듣기가 겁이 나 도망 다녔다니까요? 아휴, 정말.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시대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무대가 요원한 연극인에게도 비대면 공연은 커다란 이슈가 아닐까 해요.
맞습니다. 연극인들의 복지를 논할 때 정부 부처에서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한편으론 너무 쉽게 생각하는 면도 있는 거 같아요. 관객은 공연의 3요소에 해당할 만큼 커다란 요소인데, 이 고유성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연극의 고유성을 버리면 새로운 체계가 생겨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을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무조건인 비대면을 주장하는 건 연극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이 발생하는 것이지, 그게 연극인을 위한 본질적인 해결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극의 현장감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본질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인데 무대의 활성화에 대한 깊은 고심이 느껴지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재단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하나요?
저희는 연극인 스스로 자신이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 배우자나 부모님에겐 멋진 연극인으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되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예전엔 각자 활동으로 바빠 만나지 못했고 요즘엔 취업 활동으로 인해 서로 얼굴 보기가 어렵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이 열리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찾아와 주거든요. 우리가 생존을 위해 힘쓰는 동네가 아직 의리가 살아있고 정이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연극 동네에서 활동하는 모두를 위해 동료에게 도움을 주고 때론 받기도 하며 서로 상생해 나가 궁극적으로 연극인에 의한 연극인을 위한 복지 재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의 얼굴 길해연 님의 더 자세한 인터뷰와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는 오프라인서점 및 아래 온라인 E-Book서비스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레전드매거진 8월호 vol.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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